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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나들이

남양주_다산유적지_여유당

by 운전마마 202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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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인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이 있는 남양주 다산유적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여유당 위에는 다산의 묘소가 있고, 여유당 옆에는 실학박문관이, 건너편에는 다산 생태공원이 자리 잡고 있어 다산의 생애와 가르침을 알아보고, 실학에 대해 공부하며, 산책하고 나들이하기 좋다.

 

여유당(與猶堂)의 여유는 노자의 말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 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猶여 사방을 두려워 하는 듯하라"

는 글을보고,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를 담아 당호를 여유당으로 지었다고 한다.

 

조선의 뛰어난 인재였으나 사방에서 공격을 당하고, 여러차례 긴 세월의 유배를 겪었기에 후손들에게 몸을 사리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여유당의 뒷편 언덕을 오르면 다산의 묘소가 있다. 묘소 앞에서 옛 어른께 인사드리고, 실학박물관과 그 너머 펼쳐진 한강 물줄기를 바라본다. 다산의 묘소에서 보이는 한강의 풍광을 가리지 않도록 실학박물관을 배치하고, 층수도 낮게 지었다고 한다. 덕분에 이제는 도시가 된 남양주, 다산이 잠들어 있는 그곳에서 그윽하고 아스라한 느낌을 가진 풍경을 볼 수 있다.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등용되었으나 가톨릭 교인이라 하여 탄핵되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났다. 그 후 정조에 의해 다시 등용되어 거중기와 녹로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축조 중이던 수원화성을 짓는데 기여했고, 경기도 암행어사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그리고,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며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긴다.

 

<경세유표>는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책이고, <목민심서>는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없애고 지방 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목민관(지방관)이 가져야할 마음이 담겨 있고, 실무 지침도 기록되어 있다. 공무원들을 위한 지침서라 볼 수 있다. <흠흠신서>는 공정한 재판을 위한 형법서로 죄수에 대해 신중히 심의하는 흠휼 사상에 입각해 재판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흠흠은 '신중하고 신중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정약용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그가 살았던 집 툇마루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더없이 여유롭고 의미없는 나들이였다. 여유당의 툇마루에 앉아 여유가 몸을 사리는 與猶가 아니라 너그럽고 편안한 상태의 餘裕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의 천재 중 한명인 몸을 움츠리지 않고,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었다면...... 안타까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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